ETERNAL RETURN ETERNAL RETURN ETERNAL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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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스

누군가의 이야기

1화

오늘로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상처가 멎기 전에 비집고 들어오는 선단先端. 이름도 성분도 알 수 없는 약물. 기절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매일.
어제 등을 맞대고 잠들었던 이는 오늘 내가 살아남기 위해 죽여야 할 대상.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익숙하다 여겼던 얼굴들.
날짜를 세는 게 고통을 덜어주던 날도 있었지만 한 번과 백 번의 고통을 저울질하지 못하게 된 어느 순간부터 숫자는 의미를 갖지 않았다.
단지 내가 모방해야 할 ‘선례’가 되었던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며 저주할 뿐.
이윽고 숨을 쉬는 것보다도 살을 찢는 통증에 익숙해졌을 때.
싸늘한 실험실에 남은 건 실패작이라는 이름이 붙은 네 명의 짐승들뿐이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조차 모호해질 즈음, 백의를 입은 누군가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이 임무에 성공한다면, 너희는 자랑스러운 아글라이아의 직속 요원이 될 거다.”
그 말속에 숨겨진 다른 문장은, ‘실패한다면 우리에게 다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처절했던 우리의 신세에 비해 내려진 임무는 사용인으로 위장해 어떤 소녀를 감시하는 게 전부였다.
기약 없는 고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우리들은 그런 단순한 지령 한 줄에도 여느 때보다 필사적이었으나,
이유도 모르고 임무의 대상이 된 어린 소녀는 오직 한 명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딘가 주눅이 든 채로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 눈을 올곧게 바라보던 여자아이.
그 소녀가 나를 선택했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다시 돌아가게 된다.
내게 하루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었으므로.

2화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건 고통에 익숙해지기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단정한 복장을 입은 채 언행에 격식을 차리고 필요를 위해 시중을 드는 것.
소녀의 곁을 지키는 척 일과와 동향을 기록해 보낼 때마다 처분은 유예되고 미약한 쓸모를 증명받는다.
임무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나에게, 소녀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소녀는 가문에서 철저히 고립되고 배제당하는 존재였다.
자신의 처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듯 내게 이름을 선물하고도 친절히 대하지 말 것을 명했지만,
그러면서도 매일 밤이면 남겨둔 다과를 내 몫의 접시에 남겨두었다.
이따금 내가 이해하지 못할 다정함으로 한때 만개했던 꽃들에 대해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고,
어느 날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정원에서의 티타임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고 어울려 주었던 건 소녀에게 연민을 느껴서가 아니라,
단지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었다.
부여받은 이름과 삶 따위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죽음 앞에서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했으니까.

의무를 다할 뿐인 행동에서 호의를 돌려받는 순간이 늘어갈수록 소녀를 향한 부채감도 커졌다.
임무의 대가로 사적인 보수를 받았을 때 평소처럼 폐기하지 않고 그녀의 보석함에 넣어둔 것은,
가증스러운 감정을 덜고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소녀에게 선물한 보석은, 나의 ‘생일’에 대검 한 자루가 되어서 돌아왔다.

“태어난 날만이 생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소녀와 세레스를 이어주는 증표랍니다.”

보급받은 단검이나 싸구려 총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잘 다듬어진 검.
이음새에 가공된 보석으로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은 실험실에 있을 적 수없이 겪었던 것이었다.
갖지 못하면 죽었기 때문에 발버둥 쳐야 했지만 끝끝내 갖지 못했던 '힘'.
이 한 줄을 적어 보낸다면, 어쩌면 나는 다른 쓸모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날, 소녀는 누군가에 의해 찢긴 꿈의 잔재를 조심스레 들고 와 내밀었다.
짓밟혔던 순간들에 대한 소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모든 조각을 함께 맞추었을 때,
소녀는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으며 나를 ‘친구’라 불렀다.
지시와 임무의 일환이었을 뿐이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에도,
나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기꺼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말했다.
처음으로 나의 쓸모가 아닌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쓰지 않았다.
당신으로 인해 구제받은 목숨이라면, 남은 삶은 당신을 위해 살아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날 소녀는, 온건한 나의 ‘주인’이 되었다.

3화

의무를 저버린 침묵으로 얻어낸 나날은 지극히 따스하고도 평화로웠다.
방치된 정원 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게 차를 마시고, 서투르게 그려낸 설계도 위에 이름을 붙이는 것.
엉망으로 타버린 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 내일의 일과를 어렴풋이 그리는 하루.
그림자처럼 잇따르는 멸시와 힐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금만 이르게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안일했다는 것을. ‘그들’을 그렇게 속여넘길 수는 없었다는 것을.

[감시 임무는 해제되었다. 가주의 지시를 우선하도록.]
재난은 후회를 곱씹기도 전에 밀물처럼 차올라 우리를 집어삼켰고,
나는 페란테의 명예와 대의를 명분 삼은 임무들에 투입되었다.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하나, 아가씨의 빛을 뒤로하고 마주해야만 했던 짙은 악의들.
“소녀의 생일만큼은 소녀와 함께하기로, 약속해 줄 거죠?”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익숙한 아가씨께서 애써 웃으며 건넨 말 한마디를 곱씹고 아로새긴다.
실험의 부작용이 남은 몸을 혹사하는 진창 속에서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돌아갈 곳과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돌아가야 한다. 당신이 있는, 우리들의 집으로.
아직 당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오늘이 며칠째인지조차 알 수 없는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4화

돌아온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아가씨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힘’만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생겼음을 암시했을 뿐.

아가씨를 향해 달려나가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설령 아가씨에게 악의를 품고 앞을 막아서는 자가,
한때 좁은 유리 벽 안에서 같은 운명을 함께했던 이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가까스로 찾아낸 아가씨는, 내가 수없이 갈망하고도 경멸했던 각성자가 되어 울고 있었다.

아가씨를 보았을 때 나는 이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필경 두려워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힘을 눈앞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
내가 떠올린 감정은 우습게도 두려움보다는 아가씨를 지켜야 한다는 맹목이었다.
아가씨가 괴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익숙한 고통이 억지로 혈관을 비집고 들어와 있는 대로 할퀴어대고,
손에 쥔 검이 지르지 못한 비명 대신 샅샅이 부서져 내린다.
그것이 어떤 고통이었는지, 비로소 눈앞까지 닥친 죽음에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따위는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아가씨께서 느끼는 아픔을 나누어 갖고 싶다고,
아가씨께서 슬퍼하는 모습보다는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우리가 함께라면, 세상의 무엇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거예요. 그렇죠?”

그 말에 대답해야 하는데 이미 한계에 달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점차 의식이 멀어져가는 감각. 이미 아득해진 현실.
그 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온기. 당신과 차를 마시며 다정을 나누던 따스한 순간들.

다시 검을 잡을 수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지키는 검이 되어서······.

실험체 관찰 보고서 [ 세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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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이야기

1화

길을 가는 나그네여. 총사를 꿈꾸는 페란테 영애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가요?

'페란테'는 유서 깊은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답니다.
지금은 군수 사업, 그중에서도 총기 개발과 제작에 힘을 쓰고 있고 있지요.
그렇기에 가문의 분위기는 무척 엄격한 편이랍니다.

아버님은 언제나 무뚝뚝하신 분이셔요.
어머님은… 상냥한 분이셨다고 들었지만, 아직 한 번도 뵌 적 없답니다.
소녀에게는 위로 세 분의 형제가 있어요.
세 분 다 소녀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좋은 분들이지요.
첫째 언니께서 큰 벌을 주시는 것도,
둘째 오라버니께서 저를 '그것'이라고 부르시는 것도,
셋째 오라버니께서 제가 공들여 준비한 것을 쓰레기통에 버리시는 것도…
전부, 이 부족한 소녀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이랍니다.
이런 좋은 분들을 형제로 둔 소녀는 축복받은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이 하찮은 소녀를 꾸짖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제 유모는 항상 상냥하게, 소녀가 잘못해도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어요.
또, 제가 잠들기 전엔 항상, 침대 머리맡에서 낭만적인 총사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유모와 함께한 나날들 덕분에, 소녀는 자신감을 얻었답니다.
모두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당당히 페란테 가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지요.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가문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새로운 총기에 대해 소녀가 조심스레 의견을 꺼낸 날.
싸늘하게 저를 바라보던 모두의 표정은, 소녀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에요.
그날, 첫째 언니께서는 평소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셨지요.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어 허공을 휘적이던 느낌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어요.
이후, 저는 높은 곳을 피하게 되었답니다.
아, 하지만 소녀는 언니를 원망하지 않는답니다!
언니는 그저 가문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신 것뿐이셔요.

그렇지만… 지금도 가끔 생각해요.
제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유모는 아직 제 곁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주셨겠죠.
철없는 제 언행이 결국 유모의 탓으로 돌아가 버렸으니까요.

2화

그날 이후에도 저택은 이전과 다름이 없었답니다.
아버님과 형제들은 새로운 사업 때문에 언제나 바쁘셨어요.
소녀는 무척 적적했답니다.그토록 좋아했던 총사 이야기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고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것 뿐이었지요.​

어느 날, 가문에 새로운 정원사가 들어왔어요.
그분이 가위질을 할 때마다 꽃과 나무가 싱그러운 생기를 찾는 모습이 참 신기했답니다.
소녀는 조심스레 정원사에게 말을 걸었지요.
소녀는 유모에게 들었던 총사 이야기를 꺼냈어요.
낭만이 넘치는 고전 총기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함께요.
그는 제 말을 헛소리라고 비웃지 않았어요.
한참 동안 정원을 바라보다 나직이 말할 뿐이었죠.

아가씨라면, 할 수 있다고요.

그날부터 소녀는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형편없는 도면이었지만, 소녀는 최선을 다했어요.
가문에 있는 온갖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그렸지요.
그것은, 소녀가 처음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어요.
하지만 머지않아 오라버니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그리고 그 설계도는 소녀가 보는 앞에서 처참히 찢겼답니다.

​소녀는 정원으로 나갔어요.

하지만 그분은 정원에 계시지 않았지요.
소녀와 감히 말을 섞은 죄로, 저택에서 쫓겨났다는 말만 전해 들었어요.
그 뒤로, 정원에 감돌던 싱그러운 생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시들어가는 정원을 바라보는 쓸쓸한 날들이 이어졌답니다.

3화

어느 날, 소녀는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어요.
소녀가 홀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가문의 주치의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지요.
하지만, 소녀의 병을 치료할 순 없었어요.
결국 아버님은 제게 전담 사용인을 붙여주라 명령하셨지요.
얼마 뒤, 저택에 네 명의 사용인 후보가 도착했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들 중 한 사람을 직접 고르라고 하셨어요.

소녀는 그 누구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선택을 받은 이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답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남루하고 상처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눈에 밟혔어요.
유모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아있었거든요.
소녀는 무심코, 그 아이를 고르고 말았답니다.

그 아이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답니다.
그저 숫자로 부르라 이야기하는데, 소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요.
‘멋진’ 이름이야말로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니까요.
소녀는 그 아이의 눈 색인 ‘세레니티’에서 따와, 그 아이의 이름을 '세레스'라 지어주었답니다.
소녀는 세레스에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소녀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부디 소녀에게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요. ​

그러나 세레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소녀는 오랫동안 깊숙이 묻어두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답니다.
잃어버린 소중한 이들과, 차마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이야기들을요.
세레스는 항상 제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어요.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던 소녀는, 서랍 속 오래된 종잇조각들을 꺼냈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조각들을 세레스와 함께 하나씩 정성스레 이어 붙였지요.
너덜너덜하고 형편없는 도면이었지만…
세레스와 함께라면, 언젠가 이 총을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어느 날, 세레스가 제게 커다란 보석을 하나 선물해 주었어요.
소녀는 그 아름다운 보석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소녀의 브로치로 만들고 하나는 검을 제작해 세레스의 생일날 선물했지요.
그것은 소녀의 보잘것없는 꿈을 묵묵히 들어준 그 아이에게 건네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정의 증표랍니다. ​

그렇게 소녀에게는 또다시, 소중한 인연이 생기고 말았지요.

4화

어느 날부터인가 세레스는 자주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어요.
소녀에게 말도 없이 사라지고, 밤늦게 돌아올 때면 언제나 못 보던 상처를 달고 있었지요.
어째서 다친 것인지, 어째서 자꾸 사라지는 것인지 물어도…
세레스는 끝내 답해주지 않았어요.
소녀는 조금 화가 났지만, 그저 무사히 돌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지요.
왜냐하면, 소녀의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아무 말 없이 사라졌었으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흘러, 소녀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 찾아왔답니다.
이날만큼은 꼭 함께하자고 약속했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니 세레스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소녀는 방에 홀로 앉아 계속 기다렸답니다.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어 세 바퀴를 더 돌 때까지도…
세레스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답니다.
소녀의 생일로부터 이틀 후, 첫째 언니께서 소녀에게 선물로 기쁜 소식을 주시겠다고 찾아오셨어요.
그 소식은 세레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소녀의 곁에 머물던 소중한 이들은 언제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요.
결국 소녀가 세레스를 선택했기에, 세레스마저 불행해진 것이랍니다.
이곳에 소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한 사람들을 앗아가는 저주라면…​

그러면, 차라리 소녀가 이 저택을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5화

이왕 홀로 남겨진 몸.
이야기 속 총사가 총 한 자루만 쥐고 모험을 시작했던 것처럼,
소녀도 간단한 짐을 챙겨 저택을 나섰답니다.
다만, ‘페란테’의 이름이 얼마나 무거운지, 소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소녀는 집을 나선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답니다.
그 이후의 일들은 그저 단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아있어요.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멀리서 소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답니다.
세레스였어요. 세레스는 눈물을 흘리며 소녀를 꼭 안아주었답니다.
하지만 따스한 온기가 머물기도 잠시, 세레스는 소녀를 지켜주려다 크게 다치고 말았어요.

소녀는 소중한 세레스를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 순간, 형편없는 낙서로만 존재했던 머스킷이 소녀의 손에 기적처럼 쥐어져 있었지요.
소녀는 세레스를 위해, 세레스와 함께 악당들을 물리쳤답니다.
유모가 들려주던 이야기 속 멋진 총사처럼, 소녀도 마침내 해낸 것이지요.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레스는 소녀의 곁에 없었어요.
하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꼭 데리러 가겠다던 그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답니다. ​
그러니 소녀는 굳게 믿으며 기다릴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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